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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우, 진짜.
  10. 2009/11/16
    영화 '아무도 모른다'.

 먼저 친한 척을 하지 않는다. 상대방을 위한 배려라고 생각해서다. 

 '너와는 왠지 소통이 되지 않는 것 같아. 나만 목매는 관계야, 뭐야.'


 무리해서 친한 척을 한다. 상대방을 위한 배려라고 생각해서다. 

 '왜 이렇게, 나한테 집착하니?'


 어찌하라는 걸까.

 '중도'라는걸 배워본 적이 없는 나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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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개된 자리에서 글을 쓰려면, 최소한의 소양은 갖춰야지.. 저 혼자 쓰고 저 혼자 읽을 것도 아니면서, 남들이 읽었을 때 이해는 가게끔 써야할 것 아니야. 주술 호응도 안 시키고, 문장도 조잡하고. 어휘도 재미동포 3세 수준이면 그걸 남더러 읽으라는 건지, 뭔지.

교양이 부족하면 채우면 되지만, 교양이 과다한 경우는 약도 없다. 부러 어려운 말 쓰고, 부러 필요도 없는 수식어 더덕더덕 붙여가며 젠체한다. 참 지저분하고 쓸모없는 문장이긴 매한가지다.


2

글을 쓸 때, 가장 중요한건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가짐이다. 요즘에는 인터넷 발달로 인해 글쓰기가 일상화, 인스턴트화되어서 그런지, 이런 배려심을 찾아보기 어렵다. 완결성없이 자기 멋대로 지껄여놓곤 오히려 상대방더러 '이해하지 못해서 답답하다'거나 '행간을 읽어내지 못한다'며 타박하기도 한다.

배려심이 결여된 문장의 가장 큰 문제점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것이다. 말투와 뉘앙스에 대한 오해 뿐만 아니라, 글쓴이가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의 인식이 이루어질 수도 있음에 항상 유의해야한다.


타인의 머리 속을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글을 다 쓴 후, 글을 처음 접하는 독자의 입장이 되어 텍스트를 읽어내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것이 글쓰기에 있어서의 최소한의 규칙이자 예의다.


3

정혜신 박사의 '사람 vs 사람'을 읽었다. 몇해 전부터 벼르던 책이었는데, 마침 기회가 생겨서 읽게 되었다.

워낙 이념적 성향에 대해 우려해서 그런지, 생각보다는 공정한 시각에 의해서 쓰여졌다고 느꼈다. 인물들에 대한 분석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명박은 '자뻑 정신병자', 박근혜는 '부성컴플렉스에 빠진 소녀', 나훈아는 '최고를 지향하는 대중예술가', 김수현은 '개성강한 알부녀(알고 보면 부드러운 녀자)' 정도?

특히 그 중에서도 이명박에 대한 부분은 압권이었다. 읽는 내내 섬뜩했다. 사람이 어느 정도까지 몰인간화, 몰인정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랄까.

암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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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등감의 크기는, 우월의식의 크기에 정확히 비례한다. 스스로가 타인보다 우월하다고 느끼는만큼, 그에 비례해 열등감을 느낀다. 열등감을 심하게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우월의식이 월등한 사람이다. 

 물론 역도 성립한다. 우월의식을 강하게 느끼는 사람일 수록, 기저에 열등감이 잠복해 있다는 것.

 열등감과 우월감은 동전의 앞, 뒷면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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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웹 상에서 가장 짜증나는 것 중의 하나가 댓글이다. 왜 이렇게 수준 미달이 많은건지. 이것 때문에 IE 홈페이지를 네이버에서 다음으로 옮겼는데, 막상 지내고보니 별반 다를게 없다. 네이버에는 수구적인 애들이 많아서 짜증난다면, 다음은 진보 흉내내는 막무가내 애들이 많아서 짜증난다.

 짜증나는게 다름아니다. 사실관계를 쥐꼬리만큼도 모르면서 비난 댓글 적는 애들. 제일 한심한 부류다. 심지어는 진보적 교육의원을 놓고 한나라당 소속이라며 까던 애... 이념도 이념이지만, 그에 앞서 교육의원은 당적이 없는데. 

 기사 제대로 안 읽고 댓글다는 애들도 기피 대상이긴 마찬가지. 독해 제대로 못하거나 행간 못 짚어내는 애들은 사오정처럼 동문서답하니 애교로 봐주지만서도, 기사를 끝까지 다 읽지 않고 댓글을 다는건 도대체 무슨 심리인걸까. 단순한 심리적 배설행위? 참, 이해 불가다. 
 
 성질나게 하는 부류는 역시 엉터리 논리파. 도대체가 말도 안되는 논리를 들이민다. 법학/정치학/경제학 등 인문학 기초상식만 있어도 그런 댓글은 도저히 달 수 없을텐데, 하는 댓글들이 꽤나 많다. 예컨대, '김대중이 분배중심 경제정책을 펴서 성장이 심하게 정체됐다'라든가, '오바마야말로 진정한 개혁가다'라는 따위의. 본인은 나름 진지하게 논리를 펼치나, 밑에 '교과서 좀 읽고 오세요'라는 리플이 간혹 달리곤 한다. 주로 나이많은 사람들에게서 목격된다.

 엉터리 논리파와 비슷한 부류로, '내가 믿고 싶은 것만 믿어'파가 있다. 명백한 사실이라도 자기 맘에 안들면 거짓말이나 언플이라고 매도한다. 주로 젊은 층에 많다. 멍청파도 있다. 변희재를 가리켜, '벌금 300만원이 갖고 싶어서 진중권한테 명예훼손소송 걸었다'라는 댓글이 가장 인상적.

 가장 어이없는 부류는, 무논리파/모순파. 노통 찬양하고 자기가 진보라고 하면서 동성애자들 까는 애들, 천부인권 운운하더니 난데없이 사형 빨리 집행하라고 난리치는 애들, 글로벌 시대에 알맞게 문호를 적극 개방해야한다면서 국제결혼 때문에 튀기 국가된다고 까부는 애들, MB 보고 민주주의/인권에 역행한다고 욕하면서 정작 자기는 외국인 노동자 새끼들 다 추방해야된다고 열올리는 애들, 민주주의 운운하면서 자기와 다른 의견에는 욕부터 뱉어주는 애들. 얘네들은 좌우명이 '꼴리는 대로'인걸까. 이래서 인문학이 중요하다니까는.

 차라리 위에 있는 부류들보단, 기냥 욕만 하다 가는 애들이 오히려 정신적으로 건강하다고 봄.


 나는 댓글을 달 때, 반드시 사실관계 확인하고 쓴다. 댓글이라는게 감정의 배설구 역할도 하지만서도, 동시에 그걸 읽는 누군가에게는 정보가 된다. 잘못된 정보를 퍼뜨리는건 대단히 위험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이미 알고있는 사실도 재차 확인해서 쓰곤 하는데, 일부 네티즌들은 이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하다. 말도 안되는 댓글, 욕설 댓글 다 좋은데, 최소한 사실관계만큼은 제발 확인하고 써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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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 1,5
감독 엘라 렘하겐 (2008 / 스웨덴)
출연 구스타프 스카스가드, 토켈 페터슨, 토마스 융만, 애니카 할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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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퀴어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마이너 영화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고독과 우울함이 범람하는 내용에 한해서다. 한국 음식을 좋아한다고 해서 꼭 김치를 좋아하라는 법은 없듯, 마이너 영화를 좋아한다지만 마이너의 정수인 퀴어 영화에는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든달까. 기실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탓도 있겠지만, 완전히 처절한 결말 아니면 지나치리만큼 발랄한 결말, 즉 모 아니면 도로 엔딩을 장식하는 것이 퀴어 영화의 속성인지라, 그 유명하다는 뷁마운틴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그러던 중, 우연찮게 '패트릭 1,5(처음에는 1.5인줄 알았다)'라는 영화를 접하게 되면서, 퀴어 영화에 대한 선입견이 상당 부분 해소된 듯 싶다.

 사실, 이 영화는 퀴어라기보다는 오히려 홈드라마라고 보는게 옳지 않나 싶다. 동성 부부(夫夫)가 나오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지만, 스토리를 풀어가는 과정에 있어서는 입양인과 피입양인과의 관계에 촛점이 놓여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에서 '비'공식적으로 차별받는 동성애자의 실상을 그렸다는 점에 있어서는 퀴어라는 장르에서 한 치도 벗어남이 없지만, 종반에 가까워질 수록 이런 내용은 부수적 장치로 전락한다는 점에서, 누구나 부담없이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닐까 싶다.

 극의 내용은 단순하기 이를 데 없다. 동성 부부가 아기를 입양하는데, 실수로 다 큰 소년을 입양하게 되면서 겪는 이야기를 풀어냈다. 이렇게 써놓고 나니 참 별 볼일 없는 것 같은데, 실제로 영화를 보게 되면 그리 녹록치 만은 않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퍼뜩 든다. 극 전체에 걸쳐 긴장감을 주는 요소가 양적으로 '아주' 풍성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처럼 담담한 내용을 시종 일관 담담하게 찍어내는 방법도 있겠지만, 이 감독처럼 엔딩 10초 전까지 담담한 내용을 초조하게 찍어내는 방법도 있구나 하는 걸, 새삼 깨달았다. 자잘한 반전 속에서 거듭되는 초조함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현실감을 극대화시켜 준다는 점에서, 감독이 머리를 꽤 많이 썼겠구나 싶었다. 물론, 중간 중간 내용전개 상 아쉬운 대목이 여럿 있었다. 특히 차를 고속으로 몰고 질주하던 남자(종반부에 주사를 맞던 아들을 데려가던 아버지)가 극에 3차례나 등장하면서 스크린을 장식하였음에도, 별다른 역할을 소화하지 않은 것은 기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나는 이 사람이 당연히 복선으로서 기능할 줄 알았다). 그래도. 내가 누차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영화에는 2가지 종류가 있다. '스토리로 보는 영화'와 '감각으로 느끼는 영화'. 본 영화는 자칫 차가울 수도 있는 내용을, 몹시 따뜻하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후자에 속하는 수작이 아닐까 한다.

 영화를 감상한 후, 모 포털사이트에서 '사람은 사람을 향한다'라는 표제의 리뷰를 보았다. 이 영화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이다. 나는 여기에 덧대, '사람과 사람이 만나다'라는 촌평을 남기고 싶다. 사람으로 인해 상처받는 것도 사람이고, 사람으로 인해 구원받는 것도 온전히 사람이다. 극 중의 패트릭은 사람으로 인해 많은 상처를 입었지만(유일한 혈육인 이모에게서 뿐만 아니라, 수용시설에서도 많은 고통을 겪은 사실이 암시된다), 결국 사람으로 인해 모든 상처가 치유된다. 이러한 과정을 시종 현실적이면서도 따스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패트릭 1,5세'라고 할 수 있다. 시종일관 불량스러움을 잃지 않는 패트릭도 이 영화의 주요 감상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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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시시하다. 화를 내고는 있지만, 정작 무엇이 옳고 그른건지 가릴 수 없다.

 어릴 때부터 항상, 어디론가 멀리 떠나는 꿈을 꾸어왔다. 실제로도 몇번인가 모든 걸 놓고 떠난 적이 있다.

 아는 이라곤 아무도 없는 곳, 그리고 한적하다 못해 삭막한 곳. 

 다시 떠나고 싶다. 부질없다는 걸 알면서도.


 얼마 전, 드라마를 보았다. 

 쓸쓸한 노을이 아름답게 펼쳐진 섬이 있었다. 

 카메라 속의 모습이었지만, 왠지 모를 애수에 잠긴 듯한 풍경이었다.

 드라마의 내용은 자못 활기 있었는데, 왜 나는 그곳에서 슬픔을 느낀걸까.

 
 섬에 가고 싶다.

 육지와 단절된 곳. 

 헛된 일이라해도, 지금은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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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일을 하든, 어떤 말을 하든, 상대방에 대한 인정과 존중이 기초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라고는 눈꼽만치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 자신과 생각이 다르면 정신나간 이로 매도하는 이들.

 요즘 세태가 그러한 탓인지, 그네들의 수준 탓인지는 알 수 없다.

 
 이념, 친소를 떠나, 

 내 일이 아님에도 우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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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시다 슈이치의 퍼레이드를 다 읽었다. 집에서 소설책을 읽은 것은 거즘 십년 만인 것 같다. 그 존경해 마지 않는 다자이 상의 소설들도 집밖에서나 틈틈히 읽어왔을 뿐, 집에서는 거의 손도 대지 않을 정도였으니. 확실히 요시다의 글에는 뭔가 마력이 있나보다.

 내용을 차치하고 순전히 읽을 당시의 감상 만을 말하자면, '상당히 지루하다'였다. 지금도 그다지 감상의 변화는 없다. 그런데도 왜 끝까지 읽었느냐고 한다면, 결말이 궁금해서라고 답할 도리 밖엔 없다. 그러지 않고서야, 소설기피증이 있는 내가 '지루하다'고 하면서도 끝까지 독파한 이유를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꼭 결말이 궁금한 것만도 아니었다. 참,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다. 뭐랄까, 끊임없이 소설 속 주인공들 틈에 비집고 들어가고 싶은 욕망 탓이었달까, 아니면 나를 감심시킬 문장을 찾기 위함이었달까.

 스토리 전개 형식은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시간이나 의식의 흐름이 들쭉날쭉하고, 세계에 대한 정밀한 관찰이 지속되는. 다만, 역자의 역량 탓인지, 다른 작품에 비해 문장의 밀도가 떨어지는 편이었다. 오유리 씨가 번역했으면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중에 원서 사다 읽을까 싶기도 했지만, 그다지 큰 감응이 있던 것도 아니어서. 


 결말이 참 개연성 없었다. 신사같던 이가 난데없이 지나가던 여자들의 얼굴을 콘크리트 덩어리로 짓이기고, 그간의 범죄의 행적이 드러나는. 그리고 이러한 행동에 대해 일절 부연 설명조차 없는.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일련의 사건 간의 개연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로서는 실망스러운 결말이다. 모든 이야기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옴니버스식 구성이라서 더욱 그럴 지도. 물론 책장을 다시 펼쳐 문장 구석구석 꼼꼼히 다시 살핀다면 결말에 대한 실마리가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만한 가치를 지닌 결말은 아닐 듯 싶다.

 어차피 요시다의 소설의 묘미는 세밀한 관찰에 있으니까, 하고 자위한다. 일상에 대한 섬세한 관찰만으로도 그의 작품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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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벌지상주의 비판하는 얘기만 하면, 미친 듯이 개거품 물고 들러붙는 고딩, 대딩들이 많아서, 관련 포스트 전부다 비공개로 돌림.

 시스템의 본질적인 문제를 얘기를 해도, 계속 한동대가 어쩌느니 소수어과가 대기업 취직 잘된다느니 어쩌느니 헛소리나 짓껄여 대고.

 차라리 '학벌을 따질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라는 댓글을 달면, 나도 '그게 현실이긴 하죠'라고 답변을 할텐데,

 이건 뭐, 말귀를 아예 이해못하니, 대꾸를 해주고 싶어도 도저히 대꾸를 할 수가 없는. 


 이렇게 이름없는 블로그에도, 자본주의에 찌들다 못해 글의 행간도 못 읽어내는 질 떨어지는 인간들이 난입할 정도이니,
 
 우석훈 박사가 주창하는 '청년 연대'는 실현 가능성이 제로라고 봐도 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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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른다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2004 / 일본)
출연 야기라 유야, 키타우라 아유, 키무라 히헤이, 시미즈 모모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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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를 꽤나 싫어한다. 영화에 집중을 잘 하지 못하고 온갖 다른 생각이 떠오르는 탓도 있지만, 그보다 결정적인 이유는 '귀찮다'는 데 있다. 모니터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상황 자체가 귀찮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뭐 그런 것이다.

 영화 뿐만 아니라 소설도 싫어하는 편인데(다자이 오사무나 요시다 슈이치의 작품을 이례이자 예외. 그래서 더욱 각별), 마음에 드는 페이지만 쏙쏙 골라 읽어도 내용 이해에 별다른 무리가 없는 인문학, 사회학 계통의 서적과 달리, 맨 첫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꾸준하고도 끈질기게 읽어야한다는 압박감 탓이다. 

 영화와 소설. 이 둘은 모두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하나는 영상으로 이야기를 보여주고, 다른 하나는 활자로 이야기를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둘 다 멍한 상태에서 보거나 임의로 내용을 건너뛰어버리면 이야기의 흐름을 완전히 놓치는 탓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상당한 집중을 요구한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래서 내가 영화를 본다는 것은, 마음에 결심이 단단히 섰다는 것을 뜻한다. 

 "아무도 모른다"
 
 제목은 몇 번 들었던 적이 있고, 어떠한 스토리 라인이라는 것 또한 개략적으로 알고 있었다. '눈물 펑펑쏟는 영화'라는 극찬에 혹해, 우울함이 극에 달하던 어제. '오늘은 제발 끝까지 보자'라는 결심 하에, 재생을 시작. 

 용케 하루 내에 다 봤다. 보고난 감상은. 

 눈물이 날 정도로 슬픈 내용이라고 해서 봤고, 요즘 나의 상태가 격하게 음산한 상태였다는 것을 먼저 주지하고. 웃음이 났다. 조롱의 웃음이 아니다. 아이들이 퍽 대견해서 나는 웃음이랄까.

 영화는 시종일관 너무나도 담담한 필치로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다. 이 영화의 미덕 중 하나다. 요시다 슈이치의 느낌이 풍겼다.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을수록 뭐든지 담백한 게 끌리는 법인가보다. 그래도 음습하고 파멸적인(..) 내용을 기대했던 나로서는 많이 실망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지나치게 담담한 분위기가 입맛에 맞아 그런대로 만족이었다. 담담하게 절제된 쓸쓸함이 요란한 공포보다 깔끔하고 선명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이 영화가 가진 최고의 미덕은, '야기라 유야'라는 배우를 발견해냈다는 데 있을 것이다. 갸름한 턱선부터, 째진 눈꼬리까지 왠지 모를 고혹감이 느껴진다. 개인적인 느낌으로, 캇시 분위기가 났다. 딱히 쇼타콤에 취향이 있는 것은 아니고. 어쨌든 야기라의 표정 연기는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많은 리뷰어들 또한 야기라의 '표정'을 이 영화의 매력으로 꼽고 있는데, 나 또한 나중에는 야기라의 표정만 빤히 쳐다보고 있을 정도였으니. 신비감이 감도는 표정. 대체적으로, 표정에서 신비감이 느껴지는 연예인의 경우 백치미가 동반되기 마련인데, 야기라의 경우는 신비감과 똘똘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태어나서 처음보는 신비한 표정.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아무한테나 주는 것은 아니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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