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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귀우목(盲龜遇木).

 한 해를 결산하는 나의 '2009, 올해의 사자성어'다. 

 "인생은 B(Birth)와 D(Death)사이에 놓인 C(Choice)다"라는 샤르트르의 말처럼, 내게 있어서 올 한 해는 선택의 연속이었다. 그것도 대개가 인생을 송두리 째로 뒤흔들 선택이었다.

 선택에 대한 후회를 뼈저리게 체감하던 2009년 한 해였지만,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도 다행인 것은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참, 우연한 계기였다. 올해 초, 친구와 광화문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광화문에 갔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날 광화문 근처에서 금속노조가 도로를 점거하고 시위를 하고 있었다. 신촌 방향에서 버스를 타고 오던 친구는 '조금 늦을테니 교보문고에 가서 기다려달라'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교보문고에 들어가서 책을 읽기로 했다. 늘상 그렇듯 무의식적으로 외국어 코너에서 서성이다, 어차피 시간을 때울 거라면 소설을 읽는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소설 코너로 갔다. 정말 갑작스럽고도 우발적인 선택이었다.. 읽은 소설이라고는 중학교 때 읽었던 '마당깊은 집'이 마지막이었고,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를 지루해하다 못해 혐오하던 차였으니까. 

 그렇게 소설 코너에 갔던 나는 문득, 얼마전 yes24에서 서핑을 하다 우연찮게 발견한 '인간 실격'이라는 제목을 기억해냈다. 그리곤, 뭔가에 이끌리듯이 인간 실격을 찾아내고는 책을 펴서 마냥 읽기 시작했다. 참. 하필이면, 친구는 약속시간을 1시간 반을 넘기고서도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계속 '미안하다', '길이 너무 막혀서 택시를 탔다'라는 메세지만 불이 나케 왔다. 그렇게 해서 나는 약 60여 페이지를 읽었다. 너무나 공감이 가는 내용이었고, 한편으로는 서글픈 낭만이 느껴졌다.

 친구와 헤어진 후, 집에 와서 인간 실격을 주문했고, 며칠후 책이 집이 도착하자 방치했다.. 역시 소설은 싫었던 것이다. 그러나 운명의 끈은 참 얄궂었다. 막 개강 무렵이었는데, 통학 거리가 먼 탓에 너무 무료한 나머지 이 책을 가방에 집어넣어버린 것이다. 학교와 집을 오가며 지하철과 버스에서 틈틈히 책을 읽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강의 시간에도 책을 읽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일본어 수업 때.. (그 당시만 해도 히라가라를 알고 있는데다 시간도 마침맞게 맞아서 수강신청했던 일본어였다. 관심이 없으니 지루하기 그지없었는데, 5월달부터 일본어를 공부하기 시작하자 수업이 너무나 재미있어졌다.. 그러다보니 학원 수업과 같이 병행하면서 꽤 도움이 되었다. 이 또한 우연이라면 우연이라 하겠다)

 어쨌든. 개강 직후, 학보사에 기자 지원서를 내고, 4월 쯤 학보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동기들보다 1살 많은 나이였던 탓에 약간 위치가 애매한데다, 결정적으로 수업이 끝난 후에 1~2시간씩 학보사에 와서 회의에 참여하라는(발언권도 없는데) 말에 기겁한 나는 어떻게든 도피하기 위해 '일본어 학원을 다녀야하기 때문에, 나오기 힘들 것 같아요'라는 뻥을 치기에 이른다. 나는 언제 어디서나 칼퇴근을 사랑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뻥만 치고 그냥 집에 일찍일찍 하교하려고 했는데, 괜히 의심많은 선배들이 수강증 보여달라고 할 것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뭐 이 참에 일본어나 배워볼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렇다 '문득'.. 결국 그렇게 5월 달부터 파고다학원을 다니기 시작하며, 나의 일본어 공부는 시작되었다.

 사실 일본어 공부를 시작하자고 마음먹을 때까지만 해도, 내가 이걸 계속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으로 가득했다. 인간 실격을 접한 이후, 다자이 오사무의 다른 작품들을 접하며 일본 문학에 대해 약간은 호의적으로 바뀌긴 했지만, 일본어 자체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특히나 나의 지긋지긋한 지구력은 알아줘서, 아무리 좋아하던 취미 생활도 일주일이면 질려버리고 만다. 그래서 일본어를 시작할 때는, 그냥 시험삼아 해보자는 마음 뿐이었다. "일본어를 내가 연말까지 계속한다면, 이건 나의 천직이다. 일본어로 진로를 바꾼다"고 결심한 때도 바로 이 때였다.
 
 5월달에 처음 시작한 일본어 공부가, 2009년의 마지막 날, 바로 오늘까지 계속될 줄은 감히 상상도 못했다. 물론 그 사이에도 우연은 마치 필연처럼 이어졌다. 5월부터 8월까지 장장 4개월동안 함께했던 기초 일본어코스 강사의 재미있고 핵심적인 강의를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 지금의 나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학원 로비에서 강의실이 비기를 기다리다 우연찮게 보게 되었던 일본 드라마 '꿈을 이뤄주는 코끼리'를 지나치지 못했어도 마찬가지였을테다. 일본 드라마에 대한 기호가 식어가면서 동시에 일본어에 대한 애정이 떨어져가던 즈음 알게 된 다이고라든가, 무라카미 카즈시, 작가 요시다 슈이치 등을 알게 된 것 또한 적절한 시기의 행운이었다. 

 설렁설렁하게 공부한 결과가 어느새 JLPT 3급 자격증이 되어 돌아온다. 내 생애 최초의 어학시험 응시이자, 내 생애 최초로 갖게 될 어학시험 자격증. 돌이켜보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계기로 다자이 오사무를 알게 되면서부터 일본에 대한 혐오가 관심으로 바뀌어가고, 그 관심이 일본어 학습으로 이어지고, 또 적절한 시점에 가해지는 적절한 자극들. 

 
 끝없는 넓고 망망한 바다에 눈 먼 거북이 한 마리가 살고 있는데 이 거북은 백년마다 한 번씩 물 위로 떠오른다고 한다. 그런데 이 광활한 바다 위에는 한 개의 구멍 뚫린 나무토막이 떠다니고 있는데 이 나무토막은 한 곳에 가만히 정지돼 있는 것이 아니라 출렁대는 물결에 밀려 사해를 떠돌아 다닌다고 한다. 눈 먼 거북이 백년이 되어 물위에 머리를 내밀 바로 그때 요행히 그 머리 위에 나무토막이 있어야, 그것도 나무토막의 구멍과 거북의 머리가 일치해야만 거북은 나무토막에 의지하여 물위에 떠올라 숨을 쉴수 있다.

 거북이 해상의 어느 시점에 떠 올랐을 때 마침 그와 만나진다는 것은 몇 천만, 몇 억의 시공적 교차 중의 하나인 만큼이나 어려운 노릇이다. 거북이 떠 올랐을 때 만일 널빤지가 빨리 지나가거나, 좀 더 늦게 온다면 거북은  별 수 없이 다시 바다 밑으로 내려가 다시 1백년을 기다렸다가 다음 떠오를 시기를 기다려야 한다. 마침 널빤지가 거북의 머리 위에 와있다손 치더라도 그 또한 거북이 떠 오르기 전에는 역시 만나지지 못하게 된다. 

 맹귀우목의 고사다. 내가 주저없이 '2009, 올해의 사자성어'로 꼽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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